
‘팔레스타인 연대 포럼: 저항의 2년, 연대의 2년’의 문화 부스를 소개합니다. 이 부스는 재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직접 준비한 팔레스타인의 삶과 예술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삶과 예술을 만나보세요!
목차
- 팔레스타인 케피예(Keffiyeh)
- 전통 자수 타트리즈(Tatreez)
팔레스타인 토브(Thobe): 역사와 정체성의 살아 있는 기록 - 리나의 작품들
- 전통 춤 답케(Dabke)
- 조각난 땅, 그러나 버티는 사람들
팔레스타인 이름들: 땅의 기억과 정체성의 투쟁
팔레스타인 케피예

케피예는 서아시아 전통 머리 장식으로, 그 기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도 명예의 상징이자 거친 자연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실용적인 의복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케피예는 베두인 부족과 농민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고, 햇볕과 모래, 추위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역마다 고유한 무늬와 양식이 발전하면서 케피예는 실용적인 도구이자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 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 케피예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와 저항의 상징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1936~39년 영국에 맞선 아랍 봉기 당시, 흑백 체크무늬 케피예가 시위대의 상징적인 복장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는 농촌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보일 수 있었고, 영국 당국이 이를 금지하려 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케피예를 착용하며 집단적인 저항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금지했던 시기에는, 케피예 자체가 사실상 팔레스타인 국가 상징으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케피예 무늬 속 검은 선 또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때 팔레스타인을 광범위한 지역과 연결했던 교역로를 나타낸다고 해석되며, 주변의 문양들은 올리브 나무와 어망을 상징합니다. 이는 생계와 삶을 담은 이미지로, 팔레스타인의 역사·지리·일상을 직조해내며 케피예를 단순한 의복을 넘어 살아 있는 문화 기억의 기록으로 만듭니다.
오늘날 케피예는 전 세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정체성, 저항, 연대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케피예는 문화에 대한 자부심, 고향과의 연결, 억압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의미합니다. 팔레스타인 밖에서는 많은 이들이 팔레스타인 투쟁에 연대한다는 뜻으로 케피예를 착용합니다.
케피예는 팔레스타인의 저항과 소속감을 가장 오래되고 뚜렷하게 드러내는 상징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으며, 평범한 일상 의복이 수 세기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투쟁을 품은 강력한 정치적 선언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전통 자수 타트리즈
팔레스타인 토브: 역사와 정체성의 살아 있는 기록

작성: 나리만 (재한 팔레스타인인, 박사과정 학생)
팔레스타인 전통 의상인 토브(thobe)는 단순한 전통 옷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사회적 구조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문서다. 여리고에서 발견된 조각들을 보면 약 4,500년 전 가나안 시대의 기하학적 무늬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여덟 꼭짓별이다. 이 별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여성들이 일상생활, 마을의 상황, 주어진 자원, 그리고 경작하는 땅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토브의 한 땀 한 땀이 장소와 시간에 대한 완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베들레헴 토브는 가운데 수놓아진 여덟 꼭짓별이 특징이다. 흔히 보편적 상징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여성이 도시의 역사와 관습을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경제생활, 농업 활동,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무늬가 고대 가나안인의 무늬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팔레스타인 토브에서의 의미는 달랐다. 그것은 종교 의식이나 천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마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자수는 암호 같은 언어였다. 대부분의 토브에 있는 ‘펠라히(농민) 땀’은 여성이 땅과 농업에 연결되어 있음을 반영했다. ‘개미 땀’은 부지런함과 정밀함을 의미했고, 밭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많이 사용했다. ‘낫 땀’은 수확철과 풍요를 나타냈고, ‘이삭과 밀 땀’은 풍요와 안정성을 상징했다. 베두인의 ‘꼬임 땀’은 사막 여성들의 강인함과 인내심을 표현했다. 각 땀은 여성이 처한 상황, 사회적 역할, 마을의 경제 수준을 알려주었다.
토브는 마을마다 뚜렷하게 달랐다. 야파의 토브는 따뜻한 색감과 오렌지·레몬 무늬가 특징으로, 도시의 농업·상업 활동과 주민의 부유함을 보여주었다. 베들레헴의 토브는 정교한 자수와 여덟 꼭짓별, 자주색·분홍색 색조로 유명했는데, 이는 도시의 종교적·역사적 위상을 상징했다. 헤브론에서는 포도나무 무늬와 짙은 장식이 나타났는데, 이는 땅의 비옥함과 발달한 수공예를 드러냈다. 예루살렘의 무늬는 돔과 종교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았고, 짙은 색조는 주민들의 종교적·사회적 지위를 보여주었다. 가자의 토브는 밝은 색의 큰 꽃무늬가 특징이었고, 베르셰바의 토브는 사막빛 주황색과 베두인 무늬로 척박한 자연과의 싸움을 표현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토브에 드러났다. 신부는 흰색 바탕에 섬세하고 다채로운 자수를 놓은 토브를 입었는데, 이는 기쁨과 새로운 시작을 나타냈다. 새로 결혼한 여성의 토브는 안정된 부부 생활을 표현했고, 과부는 검은 토브를 입었는데 장식은 적고 때로는 파란색이 더해져 애도를 표현했다. 땅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실용적인 짙은 색 토브를 입었고, 종종 땅과 연결된 상징들이 장식되었다. 나이가 많은 여성들의 옷은 무늬와 색이 풍부해 지혜와 경험을 드러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팔레스타인 토브는 저항과 굳건함의 상징이 되었다. 1948년 나크바 이후 자수 토브는 생계 수단이 되었고, 여성들이 이를 팔아 가족의 하루 끼니를 마련했다. 1980년대 인티파다 시기에는 팔레스타인 국기가 금지되자 토브가 민족의 깃발로 변했다. 여성들은 토브에 국기의 색과 역사적·정치적 상징을 수놓아 저항과 정체성을 표현했고, 이로써 ‘인티파다 토브’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스라엘이 이 유산을 훔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팔레스타인 토브를 잘못된 이름으로 박물관에 전시하거나 공식 패션쇼에서 사용했음에도—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옛 토브와 자수 예술을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오며 지켜왔다. 위조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2021년 유네스코가 팔레스타인 자수를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토브는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저항의 세계적 상징이 되었다.
결국, 팔레스타인 토브의 모든 땀과 무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마을, 여성의 삶, 경제, 자연, 그리고 저항에 대한 이야기다. 토브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역사, 풍습, 문화, 그리고 공동체의 생활 수준까지 읽을 수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토브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한 민족 전체의 역사를 전하는 열린 책이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창의성과 미적 감각으로 역사를 기록한 중요한 역사학자들이었다.






리나의 작품들
작성: 리나 (재한 팔레스타인인, 회화 석사과정 학생)
땅의 여인

이 작품은 베들레헴 전통 자수 드레스(토브)를 걸친 얼굴 없는 여인을 묘사합니다. 얼굴이 없는 것은 의도적인데, 그녀가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여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어머니, 딸, 할머니를 모두 담아내며, 팔레스타인의 집단적 기억을 엮어내는 존재입니다.
토브 자체가 그녀의 목소리가 됩니다. 모든 바느질 하나하나가 기록이자 아카이브로, 세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며 팔레스타인의 풍경, 꽃, 무늬를 보존해왔습니다. 이는 아름다움의 행위이자 저항의 행위입니다. 그녀의 뒤에는 오래된 팔레스타인 집들이 서 있습니다. 1948년, 가족들이 강제로 떠나야 했던 그 집들입니다. 캔버스 아래에는 열쇠들이 걸려 있는데, 이는 상실의 상징인 동시에 귀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이 열쇠를 간직하며, 언젠가 문이 다시 열릴 것이라는 약속을 붙잡고 있습니다.
땅의 여인은 동시에 애도와 찬가입니다. 부재와 추방을 슬퍼하면서도, 굳건한 저항을 기립니다. 그것은 여성들의 저항의 역할이 종종 인정받지 못했지만, 여전히 필수적이고 지속적이며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유산의 실

이 작품에서 캔버스는 한 노년 여성의 손을 중심에 둡니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단단하고 침착한 손이 자수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전통 토브를 입고 있으며, 화면에는 가슴과 손, 그리고 그녀가 작업 중인 천만이 드러납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보다 행위 자체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입니다. 한 올의 초록 실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와 그림 밖으로 이어지고, 설치 작품과 연결됩니다. 설치물에서는 두 손이 수 놓인 천을 들고 있으며, 바늘과 실로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실은 단순한 섬유가 아닙니다. 세대를 관통하는 생명의 끈입니다. 과거의 지혜를 미래의 희망과 이어주며, 유산과 저항이 여성에서 여성으로 전해짐을 보여줍니다. 팔레스타인 자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기록이자 정체성의 지도였습니다. 각 마을과 도시의 고유한 꽃과 동물, 무늬가 그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저는 관객들에게 저항을 단순히 ‘저항의 행위’로 보지 말고, 유산으로서의 저항을 바라보길 초대합니다. 그것은 가꾸고, 전수하고, 자랑스럽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한 땀 한 땀 이어지며, 우리 민족과 땅 위에서 끊임없이 피어나는 지속적인 정신입니다.
전통 춤 답케 Dabke

샤라프 자이드 저
팔레스타인 알비레, 민속예술센터 – 2013
서론
팔레스타인 답케(dabkeh)는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민속 무용으로, 집단적 표현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 연구자 압델 아지즈 아부 후드바(Abdel Aziz Abu Hudba)에 따르면, 답케는 악기 반주와 집단적 공연이 결합된 음악적·서정적 행위로, 개인들이 통일된 리듬 동작을 통해 집단이 공유하는 감정을 표현하며 사회적·환경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팔레스타인 답케는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 퍼져 있어 다른 아랍 민속 전통과 분리하기 어렵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특수한 정치적·역사적 상황 속에서 답케는 독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활력과 감정으로 충만하며 자부심, 존엄, 저항, 굳건함을 표현하게 되었다. 따라서 답케는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회복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기원과 발전
일부 전승에 따르면 답케는 마을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이 진흙으로 집을 지을 때, 남자들이 발로 흙을 밟아 다지며 민요를 부른 것이 시작이었다. 이러한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노래에서 답케가 탄생했으며, 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소유였고 협력과 연대의 산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답케는 팔레스타인 결혼식의 필수 의례가 되었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중심적 행사로 발전했다. 이후 연극 무대와 축제로 확장되며, 민속 공연단이 전통적 형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안무를 창작했다. 대표적인 유형으로 알타야라(al-Tayyara), 알할릴리야(al-Khaliliyya), 알자우피야(al-Jawfiyya), 알마흐다라위(al-Mahdalawi), 알샤말리야(al-Shamaliyya), 알다르지(al-Darzi), 알샤라위야(al-Sharawiyya), 알자프라(al-Jafra) 등이 있다.
공연 구조
답케는 원형 또는 반원형 대형으로 이루어진다. 남녀 무용수들은 어깨를 맞대거나 팔을 걸고 나란히 서서 발걸음을 맞춘다. 선두에는 라우위흐(lawwih)라 불리는 지도자가 서서 무리를 이끈다. 그는 손수건이나 막대를 흔들며 화려한 동작을 보여주고, 춤 동작의 이름을 외쳐 그룹을 인도한다.
라우위흐는 신체적 민첩성, 카리스마, 즉흥적 재능으로 구분된다. 그는 무용수와 관객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변형 동작을 추가하며, 필요할 경우 실수를 교정한다. 그의 역할은 리듬, 조직, 열정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이다.
라우위히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용어에는 “당겨라,” “밀어라,” “원을 닫아라,” “열어라,” “샤빅(shabik, 손을 맞잡아라),” “마흐(mahh, 서로 밀착해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등이 있다. 이러한 지시는 무용수들의 일체감과 흐름을 유지시킨다.
결혼 의례
팔레스타인 결혼식은 여전히 전통적 답케 의례를 보존하고 있다. 저녁 잔치(sahra)는 흔히 사흐자(sahja, 집단 박수와 구호)로 시작하고, 이어서 히르자(hirja, 남성 무용)와 여성 집단 무용이 이어진다. 여성들은 때로 악기 없이 노래 구절에 맞춰 줄이나 원을 이루며 동작을 맞춘다.
답케는 지역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서는 어떤 춤이 하르키(harqi)로 불리고, 북부 팔레스타인에서는 와흐다 윈누스프(wahda w-nusf, ‘하나 반’)라 불리며, 중앙 팔레스타인에서는 마즐라즈(mazlaj)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명칭은 지역적 변이와 차이를 반영한다.
답케의 유형
- 알사흐자(Al-Sahja): 남자들이 서로 마주 보며 두 줄을 서거나 원형을 이루고, 박수와 구호를 주고받으며 리듬과 시적 교환을 강조한다.
- 알구라이바(Al-Ghuraybah): 무용수들이 두 줄로 서서 손을 맞잡고 발을 맞추며 움직인다. 축제 자리에서 자주 추며, 단합과 협력을 상징한다.
- 알아타바와 알달오나(Al-’Ataba & Al-Dal’ona): 사랑, 투쟁, 자부심,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시적 구절을 노래하며, 즉흥 시인(자잘, zajjal)이 구절을 이끌면 무리가 응답한다.
- 알사메르(Al-Samer): 베두인 전통에서 비롯된 형태로, 시와 춤이 결합된다. 한 무리가 자랑하거나 풍자하면 다른 무리가 대응한다. 때로는 조롱, 때로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응수로 이어지며, 아랍 구전 전통의 가장 진정한 표현 중 하나로 여겨진다.
각각의 답케 유형은 특정한 행사, 리듬, 상징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 공동체적 가치와 유산을 반영한다.
문화적 저항으로서의 답케
팔레스타인 답케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선다. 이는 점령과 문화적 말소 시도에 맞서는 저항의 형태다. 답케를 공연하고 기록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인의 존재, 역사, 땅과의 연결을 확인하는 행위다.
답케는 문화적 최전선에서, 팔레스타인 존재의 역사적 연속성을 주장하며 시온주의적 주장과 서사를 반박하는 수단이 되어 왔다. 의례, 의상, 음악, 동작을 포함한 답케의 유산은 팔레스타인 문명과 문화 정체성의 본질적인 일부다.
결론
답케는 팔레스타인의 가장 중요한 민속 전통 중 하나로, 음악·시·리듬·동작이 결합된 공동체적 공연이다. 이는 협력, 자부심, 저항, 문화적 지속성의 가치를 담고 있다.
답케는 마을 마당, 결혼식 마당, 연극 무대, 영화 속에서 실천되고 기록됨으로써, 왜곡과 도둑질로부터 유산을 지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 존엄, 문화적 표현의 권리를 재확인한다. 따라서 답케는 단순한 춤이 아니라, 정체성·회복력·소속감을 선언하는 행위이다.
조각난 땅, 그러나 버티는 사람들
팔레스타인 이름들: 땅의 기억과 정체성의 투쟁

작성: 나리만 (재한 팔레스타인인, 박사과정 학생)
팔레스타인은 단순히 종이 위의 지도만이 아니다. 언덕, 계곡, 강, 마을, 도시의 이름 속에 한 민족의 역사가 담겨 있는 땅이다. 모든 이름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수천 년 동안 인간과 땅의 관계를 증언한다. 이름은 스쳐가는 단어가 아니라, 가나안인과 페니키아인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삶의 산 증거다. 이후 아랍인과 무슬림이 이 이름들을 지켜내며 새로운 도시와 동네를 보탰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1948년 이전의 땅 상실
팔레스타인 비극은 1948년 나크바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오랜 정책의 결과였다. 영국 위임통치 시기부터 분할 계획이 시작되었고, 1947년에는 유엔 분할 결의안이 나와 유대인들이 소수였음에도 팔레스타인 땅의 절반 이상을 그들에게 넘겼다. 목표는 시온주의 국가를 세우고, 예루살렘, 야파, 하이파와 같은 주요 도시와 항구를 점령자들이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크바가 닥쳤다. 7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추방당했고, 500개 이상의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부재자 재산법’에 따라 팔레스타인 땅은 몰수되었다. 난민을 “부재자”라 규정하고, 이스라엘에 그들의 재산을 빼앗을 권리를 준 것이다. 이 법은 팔레스타인 존재를 지우고 땅에 새로운 이야기를 강제로 씌운 주요한 단계였다! 그런데 과연 말이 되는가? 유엔 결의안 194호와 우리의 귀환권은 어디로 간 것인가?
오슬로 협정과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들은 1993년 오슬로 협정에 서명하면서 1967년 국경선을 기준으로 독립국가를 되찾을 희망을 걸었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것이 전 땅을 되찾는 시작이라고 여겼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당시 나의 어머니는 그것을 환영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찬성한다.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몰라서 그래. 우리가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은 적어도 내가 팔레스타인인이라고 적힌 문서를 가졌어. 최소한 내가 아랍인이라고만 불리던 때와 달리, 종이에 내가 팔레스타인인이라고 쓰여 있잖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저 ‘아랍인’으로 불렸을 뿐이었다. 나는 정체성을 갖는 것을 지지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조건부 정체성이 과연 진정한 정체성인가? 협정상 정착촌은 점차 철거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정착촌은 철거되지 않고 오히려 배가되었으며, 서안 지구는 ‘A’, ‘B’, ‘C’ 지역으로 쪼개져 군사 검문소와 정착민 전용 도로망에 갇혔다. 팔레스타인 국가의 경계가 될 땅은 파편화되어 고립되었다. 그래서 많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 이른바 ‘두 국가 해법’이라는 말은 책임 회피일 뿐이며, 현실은 전혀 다르다.
분리 장벽: 땅의 몸에 새겨진 상처, 햇빛을 지우려는 시도
2000년대 초 시작된 분리 장벽은 단순한 안보 장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식민적 프로젝트로 땅을 갈라놓고 마을을 농지와 격리시켰다. 수천 두남의 땅이 몰수되었고, 가족들은 포위되었으며, 학생들은 학교에 가려면 군사 허가가 필요하게 되었고, 농부들은 올리브 밭에 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국제적 반응도 있었다.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장벽이 불법이라고 판결하고 철거 및 피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벽은 여전히 서 있으며, 팔레스타인이 매일 겪는 인종차별적 분리를 상징한다. 그래서 장벽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파괴 대상이 되었고, 매번 충돌 때마다 그들은 장벽을 불태우고 구멍을 뚫으며 언젠가는 뽑아버릴 것이라 다짐한다.
정착촌과 금지된 도로들
장벽과 더불어, 점령자 정착민들을 위한 고속도로가 서안 지구 한복판을 가로질러 뚫렸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도로를 쓸 수 없다! 이런 도로는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라 정착촌을 팔레스타인 마을과 분리해 이스라엘과 연결하는 계획적 정책이었다. 팔레스타인 땅은 섬처럼 포위되었다. 새 정착촌들은 팔레스타인 마을 땅 위에 세워졌고, 유산과 정체성의 일부를 파괴했으며, 토지를 유대화하는 프로젝트의 핵심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도로 건설은 여전히 제약 없이 계속된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국제사회가 거부했으면서, 팔레스타인 문제에는 침묵하는 것이 놀랍다.
팔레스타인 이름 바꾸기: 진짜 이유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8만 개 이상의 팔레스타인·아랍 이름이 바뀌었다. 도시, 마을, 거리, 심지어 종교 유적지 이름까지 바뀌었다. 예루살렘은 “예루샬라임,” 알칼릴은 “헤브론(히브리식),” 나사렛은 “네츠레트,” 사파드는 “츠파트,” 루드(리드)는 “로드,” 야파는 “텔아비브–야포”의 일부가 되었다.
이름을 바꾼 진짜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 종교적·토라적 정당화: 팔레스타인 마을을 토라에 나오는 이름과 연결시켜 유대인의 “역사적 권리”를 증명하려는 것. 예: 비산을 “베이트 셰안,” 루드를 “로드.”
- 새로운 민족주의 서사: 이스라엘은 자신을 역사가 깊은 국가로 보이게 하려 했고, 이를 위해 언어적 지도를 새로 만들어 땅을 유대 민족주의 이야기 속에 통합시켰다.
- 팔레스타인 정체성 지우기: 팔레스타인 이름을 지움으로써 미래 세대가 자신들의 문화·사회적 역사를 인식할 능력을 줄이려 했다.
- 과학적·정치적 이유: 시온주의 언어·지리 위원회가 체계적으로 이름을 변환해 ‘학술적’으로 보이게 했고, 이는 프로젝트에 공식성과 문서성을 부여했다.
가나안, 아랍, 이슬람적 뿌리
팔레스타인 이름은 어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대부분 가나안인과 페니키아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파: “아름다운,” 수천 년 된 교역 항구.
아카: 어근 “아크” — 뜨거운 모래, 방어와 교역 중심지.
가자: 힘과 굳건함, 역대 침략자들 앞에서 버텨온 도시.
예루살렘: 가나안어 “우루샬림,” 평화의 도시.
아랍인과 무슬림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왔을 때도 이 이름들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보존했고, 풍경과 일상에 맞는 새로운 도시와 마을을 더했다. 라마, 알비레, 자발 무카비르, 라스 칼리드 등이 그 예다.
팔레스타인인의 끈질김과 민중의 기억
히브리 지도, 장벽, 정착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이름은 민중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옛 마을 이름들을 들려준다: “사파드,” “야파,” “베이트 다잔,” “알마즈달,” “알탄투라.” 이 이름들은 지울 수 없는 진실을 간직한 문화적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전통 의상(토브)조차 이 기억을 반영한다. 자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마을 이름과 역사적 상징을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베들레헴의 별 같은 문양은 전통과 종교, 역사를 이야기한다.
결론
팔레스타인은 단순한 정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다. 이름 바꾸기, 장벽, 정착촌, 금지된 도로, ‘부재자 재산법’은 모두 역사를 지우려는 도구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인은 여전히 옛 마을의 이름을 부르고, 구전과 문화로 전통을 보존하며, 정체성 지우기에 맞서 싸운다. 모든 언덕과 계곡, 도시에는 살아 있는 기억이 담겨 있어, 땅이 민족의 것임을 증명한다. 팔레스타인은 새 지도들이 아무리 지우려 해도 그 아들딸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조부모가 죽더라도, 나의 마을 기억은 조상 덕분에 내 안에 새겨져 있고, 나는 그것을 내 자식들에게, 또 그들의 자식들에게 전할 것이다.